설교문 모음/수요 예배 설교

[수요예배설교] 부모를 향한 주님의 위로, 눅 7:11-17

나는 PRAYER 2022. 12. 1.

부모를 향한 주님의 위로

본문: 누가복음 7장 11-17절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우리나라가 요새 떠들썩합니다. 왜냐하면 월드컵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1차전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아주 선전하는 모습으로 16강 진출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저께 가나와의 2차전에서 아주 아깝게 경기 져서 그 이야기로 어제, 오늘 계속해서 각종 기사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이 떠들썩합니다.

 

이렇게 월드컵 열기로 한창 뜨거울 때, 이 즐거운 경기를 즐기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분들입니다. 그저께 기사를 보다 보니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 협의회를 추진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월드컵 열기에 이태원 참사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데 유가족분들은 아직 치유되지 않은 고통 속에서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며 자녀들에게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진상을 규명해 달라며 협의회를 만든 것입니다.

 

참 가슴 아픈 일이죠. ‘단장지애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창자가 끊어져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인데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이르는 말입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만큼 부모님들에게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잃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 자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만큼 부모님들을 힘들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큰 병에 걸린다든지, 사고를 당한다든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든지 자녀들에게 어떤 환란과 고난이 닥쳐올 때 내가 아픈 것보다 자녀들이 아플 때 더 힘들어하는 것이 부모인 것 같습니다.

 

저희 가정은 아직 부모가 되어가고 있는 초짜들인데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많은 걱정이 저에게 있습니다. 이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부터 어디 하나 아픈 곳 없이 태어나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항상 합니다. 요새 아기들이 태어날 때부터 어딘가 문제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들이 많다고 하니 벌써부터 그런 걱정이 됩니다. 만약 그렇게 태어난다면 제가 건강하지 못해서 우리 아이가 아프게 태어났다고 하는 자책부터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태어나서도 아이가 어딜 다친다든지, 아프다든지 하면 내가 잘 못 돌봐서 그렇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자녀들을 키우고 계신 우리 부모님들을 말씀으로 위로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자녀들을 키우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될 텐데 그때 우리 주님은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살펴보며 힘을 얻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한 장례 행렬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큰 무리는 이 장례 행렬과 교차하여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항상 기쁨으로 환호하는 무리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과 놀라운 말씀들을 듣고 따르며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장례 행렬은 어떻습니까? 슬픔으로 통곡하는 무리입니다. 연세가 많이 드신 어르신들이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가시면 호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호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족을 잃은 슬픔은 누구에게나 큰 아픔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죽은 이의 가족을 보니 더 큰 슬픔에 빠질 법합니다. 죽은 이는 외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만이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과부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정말 애지중지 힘겹게 키웠을 텐데 그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슬픔에 빠진 여인이 예수님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자녀로 인해 슬픔에 빠진 이 여인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녀들의 문제로 인해 슬픔에 빠질 때가 있는데 그때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 어려움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도록 하실까요?

 

첫째, 우리 주님께서는 상심한 부모를 주목하시고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13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이 과부는 이미 남편을 잃었고 이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죽게 되어 의지의 대상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나면 함께 하던 많은 무리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여인은 홀로 외롭게 남겨질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광경을 보시고는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7절에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염려가 있을 때 맡기면 주께서 돌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어려움을 주님께서 아시고 관심 있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인성에 들어간 사건은 이번 한 번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인성에 단 한 번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이 아들을 잃은 과부를 아시고 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나인성에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과부의 어려움에 주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 여인의 아픔을 아시고 직접 찾아와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가 이렇게 불행을 당하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께서 그녀를 향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큰 은혜입니다. 우리도 자녀의 문제로 인해 슬픔에 빠질 때, 어려움에 빠질 때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향해 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행, 저런 역경 다 당할 때,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이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도 주님께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 지금 만나러 오고 계신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한없이 울고 있는 홀로 사는 여인에게 다가가서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마라!”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내가 책임을 져 주겠다라는 뜻입니다. 곧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처지,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주님은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은 비웃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에 책임을 지고 그 소녀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과부에게 고통과 눈물을 종식시켜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울지 말라 하시면 울음을 그치면 됩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이 세미한 음성을 놓치지 않는 자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상심한 부모님들의 마음을 아시고 위로해 주시며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 약속하심을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나아가 주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누리는 각 가정이 되길 소망합니다.

 

둘째, 어려움에 빠진 자녀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이 아들은 주님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주님께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청년을 위하여 친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 당시에는 사체나 그 관을 만지는 것을 깨끗하지 못하다고 여겨 다들 꺼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관을 멘 사람들이 놀라서 멈추어 섰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친히 이 아들의 죽음에 개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시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생긴 어려움으로 우리 자녀들이 너무 낙심한 나머지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람이 너무 힘들고 지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그럴 때도 우리 주님은 우리 자녀들을 기억하고 먼저 찾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자녀들의 문제에 손을 대었다, 개입하셨다고 하면 그 문제는 반드시 해결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곧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우리 주님께서는 청년을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청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에게 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그 어려움 가운데서 일으켜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우리 자녀들의 문제에 손을 대시고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쓰러진 자녀들을 회복시켜 일으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개입의 도움으로 자녀들의 상한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미국 보스턴의 지하 병동에 한 소녀가 격리 수용돼 있었습니다. 소녀는 마음의 어둠 때문에 심한 정신병을 앓아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지르고 사납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회복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부모도 이 아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회복 불가능이라고 낙인찍힌 이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퇴한 늙은 한 간호사가 이 소녀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간호사는 6개월 동안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소녀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마음속 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세상을 향해 문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 불가능이라던 정신 질환마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마음의 빛을 찾은 소녀는 자신과 같은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소녀가 바로 헬렌 켈러를 세상의 빛으로 이끈 앤 설리번 메이시입니다.

 

이처럼 어려움에 빠진 자녀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이 우리 자녀들을 찾아와 만나주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고 그 사건에 개입해 주시면 문제가 해결되고 주님께서 일으켜주시면 모든 것이 회복되어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과부였던 이 여인은 아들을 잃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주님이 그 여인의 아픔을 아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친히 사건에 개입해 주셔서 자녀가 어려움에 빠져 쓰러졌을 때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회복되어 과부와 아들이 다시 만나 큰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문제에 관심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이 처한 문제로 인해 슬픔에 빠지고 어려움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도움의 손길로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셔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고 우리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낙심하지 마시고 울지 마라말씀하시며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은혜의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먼저 나서서 문제의 근원을 찾아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리는 자녀들이 되어 각 가정에서 날마다 우리 삶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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